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사건 (문단 편집) == 사건 수사, 결과 == 사카모토가 실종되자 이 사건을 명백히 조사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. 동료 변호사들과 사카모토의 부모 모두 사카모토 일가족이 옴진리교에게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사명감 같은 건 다 갖다버린 [[일본 경찰]]은 이런 주장을 무시하고 형식적인 조사만 행한 뒤 시체가 발견되지 않자 곧 수사를 종결해 버렸다. 이후 시체가 발견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재수색 따위는 하지 않았다. 게다가 당시 현장에서 옴진리교 간부만 착용하는 배지가 발견되었는데도 경찰은 이를 무시했다. 옴진리교도 이 사실이 보도되자 갑자기 이 배지를 대량 생산하고는 '그것은 옴진리교의 신도 모두가 다는 배지고 교단에서 그 배지를 엄청나게 만들어 퍼트렸는데 그 중 하나가 어쩌다 사카모토의 집에 있던 것'이라고 웃기지도 않는 발뺌을 했다. 그러나 상식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주장이 먹힐 리가 없었다. 사실 사카모토가 소속된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가 자유법조단(自由法曹団)[* 창립 멤버 중에 [[후세 다쓰지]]도 있다.] 소속이었음이 일본 경찰이 사건을 형식적으로만 수사한 가장 큰 이유였다. [[무라카미 하루키]]의 [[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]] 논픽션 르포 〈[[언더그라운드#s-1.1|언더그라운드]]〉에 실린 동료 나카무라 유지 변호사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사카모토의 법률 사무소에는 [[좌파]] 자유주의적 성향의 변호사들이 많았다. 노동사건 이외 사건도 많이 처리하는 지금과 달리 과거에는 노동 사건 등을 많이 처리했던 터라 '특수한' 법률 사무소라는 이미지가 널리 퍼졌는데, 경찰 관계자들은 '[[성급한 일반화의 오류|그 사무소는 원래 그런 곳이다]].' 라고 하면서 [[일본공산당]] 계열로 [[종북몰이|간주했다는 것이다.]] 특히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는 1986년 11월에 도쿄도 [[마치다시]]에서 발각된 일본공산당 간부 도청사건, 1986년 12월에 발생한 일본 국철 노동조합 요코하마 '인재센터' 탄압 사건(国労横浜人活弾圧事件)[* [[일본국유철도|일본 국철]]에서 요코하마시의 다카시마역(高島駅)에 이른바 '요코하마 인재 활용 센터'라는 것을 두고 국철 노동조합원들을 이곳으로 이동 발령내렸는데 여기에 저항하는 운동을 펼치던 노조원 5명을 대상으로 폭력 사건을 날조해서 면직, 정직 등 징계 처분을 내린 사건이다. 2004년 2월 24일, 징계가 위법, 무효임을 인정받고 전원 복직되었다. [[http://www.jcp.or.jp/akahata/aik3/2004-02-25/05_02.html|참고 링크]]]으로 [[가나가와현]] 지방경찰청과 정면으로 충돌한 이력이 있었다. 그 중에서도 일본 국철 노동조합 요코하마 '인재센터' 탄압 사건은 사카모토가 직접 맡았다. 이 알력이 가라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카모토 변호사 가족 참살 사건이 터진 것이다. [[반공주의]]가 강한 일본 경찰에게 일본공산당과 관계된 변호사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. 한 마디로 '좌익 계열 법률 사무소 소속 변호사가 당한 살인사건이니 신경쓰지 않았다.'는 뜻이다. 피해자가 어떤 사람이건 살인사건을 방관한다는 것은 도저히 경찰이 할 짓이라고 볼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. 게다가 피해자 중에는 고작 한 살짜리 아기도 있었다. 일본 경찰은 결국 [[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]] 이후 이 살인사건에도 연루된 간부들이 체포되고 이들 중 오카사키가 범행을 자백한 뒤에야 재수사에 착수했다. 사건 발생으로부터 '''6년'''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. 1995년 9월, 각각 나가노현과 니가타현과 토야마현의 암매장지에서 사카모토 일가의 시신이 발견됐다. [[https://ko.wikipedia.org/wiki/사카모토_쓰쓰미_변호사_일가족_살해_사건|한국어 위키백과 사카모토 변호사 가족 참살사건 문서]]에 따르면 사카모토 츠츠미는 [[니가타현]] 나다치마치(현재의 조에츠시)의 산 속에, 아내 사카모토 사토코는 토야마현 우오즈시 베츠마타의 베츠마타소가타케선(別又僧ヶ岳線) 옆 산길에, 장남 사카모토 타츠히코는 [[나가노현]] 오마치시의 히나타야마 산속에 암매장되었다고 한다.[* 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8kKSExuZY4A|이 일본 방송]]은 아들 타츠히코의 사체를 나가노현 오마치시의 히나타야마 산 속에서 찾았다는 뉴스 속보다.] 이후 재판을 거쳐 나카가와 등 실행범들과 사건을 지시한 장본인인 아사하라 쇼쿄 등 6명은 전원 [[사형]] 선고를 받고 2018년 7월 옴진리교 재판이 마무리된 이후 몇 달 뒤 처형되었다. 다만 이 사건만으로 사형이 내려진 것은 아니고 이들 대부분이 다른 살인행각에도 연루되었다. 이걸 다 고려해서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. 당장 주동자 나카가와만 해도 무려 25명을 죽였다. 그러나 범인 중 한 사람인 무라이는 1995년 4월 23일, [[무라이 히데오 척살 사건|언론 취재진 앞에서 재일 한국인 폭력단원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]] 재판을 받을 수 없었다.[[https://ja.wikipedia.org/wiki/村井秀夫刺殺事件|村井秀夫刺殺事件]][* 다만 이 때 죽는 것이 차라리 나았던 게, 그나마 사린가스 테러범들 중에는 무기징역을 받은 자들도 나왔지만 이 사건 실행범들은 전원 사형이었다.] [[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]]과 함께 옴진리교의 악행을 얘기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엄청난 사건이다.[* 다만 [[옴진리교]]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, 사실 옴진리교가 저지른 사건들은 어느 하나 전세계를 발칵 뒤집은 흉악범죄사건이 아닌 것이 없다. 이게 어느 정도인지 상상하고 싶다면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United_States_State_Department_list_of_Foreign_Terrorist_Organizations|미국 국무부가 옴진리교를 테러집단 명단에 등재한것]] 을 보자. 옴진리교 문서에도 적혀 있다.] 애초에 1995년 3월 사린가스 살포 사건은 [[메구로공증인사무소 사무장 납치 감금 치사 사건]], 사카모토 살인사건 등으로 경찰의 의혹이 옴진리교에 집중되자 테러를 일으키면 수사망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벌인 일이었다. 하지만 오히려 테러 사건을 계기로 감춰둔 살인 사건들까지 모조리 드러나는 꼴이 되었다. * 주범 - 나카가와 토모마사(中川智正) - 2011년 11월 18일 사형 확정 - [[https://news.yahoo.co.jp/articles/0838aed955294605b1993ddbc6644e58c7aae363|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]][* 집행지는 히로시마 구치소] * 주범 - 하야카와 키요히데(早川紀代秀) - 2009년 7월 17일 사형 확정 - [[https://news.yahoo.co.jp/articles/0838aed955294605b1993ddbc6644e58c7aae363|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]][* 집행지는 후쿠오카 구치소] * 주범 - 니이미 토모미츠(新実智光) - 2010년 1월 19일 사형 확정 - [[https://news.yahoo.co.jp/articles/0838aed955294605b1993ddbc6644e58c7aae363|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]][* 집행지는 오사카 구치소] * 주범 - 오카자키 카즈아키(岡﨑一明) - 2005년 4월 7일 사형 확정 - 2018년 7월 26일 사형 집행 * 주범 - 하시모토 사토루(端本悟) - 2007년 10월 사형 확정 - 2018년 7월 26일 사형 집행 도쿄 사린가스 테러사건과 관련된 자들은 6일 먼저 처형되었고, 나머지 2명도 26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